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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와 덴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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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일본의 제124대 천황으로 실존 여부가 확실한 고훈 시대(古墳時代) 이후의 일본의 천황들 중 최장 기간 동안 재위한 천황이다.[3]
다이쇼 덴노와 데이메이 황후의 맏아들이며 대일본제국 헌법#제1장 천황상 최고 군통수권자로서 태평양 전쟁 개전을 결정해서 전쟁에 직접적으로 책임이 있다. 유년 시절 사용한 어칭호는 미치노미야(迪宮)이며, 휘(이름)는 미치노미야[4] 히로히토(迪宮裕仁)[5] 이다. 재위 기간 동안 사용한 연호는 '쇼와(昭和; 소화)'이다.
일본 이외의 외국에서는 주로 연호로 불리는 메이지 덴노와 다이쇼 덴노와는 달리 '쇼와'보다는 이름인 '히로히토'로 불리는 경우가 많다. 천황이 살아있을 땐 이름으로 불리고 죽고 나서야 연호로 불리며, 그래서 이 문서명도 '쇼와 덴노'가 되었는데, 1989년 사망할 때까지 외국 언론들에서 '히로히토'라고 부르던 게 굳어져서 그런 것으로 보인다.
4월 29일생으로 이날이 전전에는 '천자의 생일'이라는 의미에서 천장절(天長節)[6] 이라는 공휴일이었다. 그러던 것이 전후 식목일, 정확히는 '녹색의 날'로 바뀌었다가 2007년 자민당, 공명당, 민주당의 합의로 기존 녹색의 날을 헌법기념일인 5월 3일과 어린이날인 5월 5일 사이 국민의 휴일로 불리던 5월 4일로 옮기고 4월 29일은 '쇼와의 날'로 개칭되었는데, 이때 옛 일본 제국의 식민지였던 국가들에서 반발이 나오기도 했다.
독립국가와 식민지배를 막론하고 명목상 한반도의 통치자였던 마지막 군주이기도 하다. 정확히는 군주를 대리하는 총독을 통한 간접통치. 물론 그런 사실 자체가 한국인들에게는 흑역사로 취급된다.
2. 생애[편집]
자세한 내용은 쇼와 덴노/생애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3. 전쟁 책임[편집]
자세한 내용은 쇼와 덴노/전쟁 책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4. 대외 관계[편집]
자세한 내용은 쇼와 덴노/다른 나라와의 관계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5. 가족 관계[편집]
5.1. 황실 가계도[편집]
5.2. 자녀[편집]
다이쇼 덴노와 데이메이 황후의 4남 중 장남으로 출생, 아내 고준 황후와의 사이에서 2남 5녀를 낳았다. 쇼와 덴노는 남편이자 아버지로서는 매우 모범적이고 좋은 사람이었다고 한다.
쇼와 덴노와 나가코 황후의 자녀들은 장남 아키히토와 막내딸 시마즈 타카코를 제외하고는 모두 일찍 죽거나, 건강이 나쁘거나, 아이를 낳지 못하거나, 부부관계가 원만치 못하거나, 일찍 과부가 되는 등 하나같이 불행한 삶을 살았다.
- 장녀 데루노미야 시게코(照宮成子) 내친왕(1925.12.6-1961.7.23): 방계 황족 모리히로 왕과 결혼, 3남 2녀를 낳았다. 다이쇼 덴노가 생전에 본 유일한 손주이기도 하다. 패전 후 신적강하로 평민 신분으로 떨어졌고, 만 35세의 젊은 나이에 암으로 죽어 쇼와덴노와 나가코 황후 내외는 큰 충격을 받았다.
- 차녀 히사노미야 사치코(久宮祐子) 내친왕(1927.9.10-1928.3.8): 병으로 요절. 나가코 황후는 직접 밤을 새워가며 사치코 공주를 간병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아기였던 사치코 공주의 장례는 간소하게 치러졌고, 슬픔에 잠긴 나가코 황후는 한동안 아기와 같은 크기의 베개를 끌어안고 지냈다고 한다.
- 3녀 다카노미야 카즈코(孝宮和子) 내친왕(1929.9.30-1989.5.26): 옛 화족 다카츠카사 도시미치(鷹司平通)와 결혼. 자녀는 없다. 남편 도시미치의 간통과 사망으로 과부가 되었고, 강도까지 당했다. 그 후 친정인 황실에 돌아와 이세 신궁의 제관을 맡아보며 살다가, 아버지 쇼와 덴노가 사망한 지 얼마 안 되어 뒤따르듯 죽었다.
- 4녀 요리노미야 아츠코(順宮厚子) 내친왕(1931.3.7-): 옛 화족 이케다 다카마사(池田隆政)와 결혼. 자녀는 없다. 오랫동안 병으로 고생했고, 거의 말이 없고 과묵한 성품이라고 한다.
- 장남 쓰구노미야 아키히토(繼宮明仁) 친왕(1933.12.23-): 최초로 평민 출신인 쇼다 미치코와 연애결혼(테니스 로맨스의 사랑)을 하여 화제를 모았다. 나루히토 황태자를 포함한 2남 1녀를 낳았다.
- 차남 요시노미야 마사히토(義宮正仁) 친왕(1935.11.28-): 어머니 나가코 황후가 고른 옛 화족 가문의 딸 츠가루 하나코(津輕華子)와 결혼하였고, 결혼 후로 히타치노미야(常陸宮)라는 미야고(궁호)를 받았다. 히타치노미야 마사히토 친왕은 형제들 가운데 유일하게 4년제 대학을 졸업한 사람이기도 하다. 자녀가 없어 훗날 마사히토나 하나코가 사망하게 된다면 궁가가 단절될 예정이다.
- 5녀 스가노미야 타카코(淸宮貴子) 내친왕(1939.3.2-): 어머니 나가코 황후의 외사촌 남동생[7] 인, 옛 화족 시마즈 히사나가(島津久永)와 결혼하여 1남을 낳았다. 쇼와 덴노와 나가코 황후의 딸 5명 중에서 유일하게 행복한 삶을 살아간 인물로, 바로 위의 언니 이케다 아츠코와는 정반대로 활달하고 화려하며 떠들썩한 성품의 소유자라고 한다.
5.3. 형제[편집]
- 첫째 남동생 지치부노미야 야스히토 친왕: 1902. 6. 25 ~ 1953. 1. 4
- 둘째 남동생 타카마츠노미야 노부히토 친왕: 1905. 1. 3 ~ 1987. 2. 3
- 막내 남동생 미카사노미야 다카히토 친왕: 1915. 12. 2 ~ 2016. 10. 27
5.4. 가혹했던 고부 관계[편집]
아내 고준 황후는 일본 막장 드라마를 현실로 찍었다. 큰아들인 아키히토 황태자가 평민 쇼다 미치코와 결혼하려 할 때, 우익 단체까지 동원해가면서 엄청 반대했다. 미치코가 말이 평민이지 재벌가이자 아시아 최대 제분회사 닛신(日淸) 제분의 장녀에, 외가는 옛 화족(백작) 소에지마(副島) 가문이었으며, 가문뿐만 아니라 미치코 본인 역시 미모와 지성까지, 무엇 하나 빠지는 구석이 없었다. 당시 공부도 잘해서 명문 세이신여자대학 영문과를 수석으로 졸업한 엘리트 학생이었다.
미치코가 황태자비가 된 후로, 나가코 황후는 악독한 시어머니의 교과서가 무엇인지 아주 제대로 보여주었다. 심지어 미치코 황태자비가 황후가 된 후로도, 나가코 태후와 그녀의 똘마니들은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미치코 황후는 시어머니 나가코 황태후에게 어찌나 시달렸는지, 1993년 10월 20일 만 59세 되던 해에 실어증으로 쓰러지기까지 했다. 나가코 태후는 그녀 자신이 사망하는 순간인 2000년까지, 40여년간 단 한순간도 빠짐없이 미치코 황후를 들들 볶았다.
그러나 그런 나가코 황후도 젊은 시절엔 똑같았다. 사실 그녀 역시 시어머니 사다코 태후(데이메이 황후)에게 30여년간 호된 시집살이를 당했다고 한다. 군기잡기, 꼰대질을 당했던 사람이 당한 것을 되풀이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 놀랄 일도 아니다. 사다코 태후의 시녀 다케야 츠네코(竹屋津根子)와 나가코 황후의 시녀 다케야 시게코(竹屋志計子)는 친자매였지만, 웃전들의 기싸움으로 인해 서로 눈치를 보며 대화조차 나누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평소에도 나가코 황후를 고깝게 보던 사다코 태후는 자신이 꾸짖고 싶으면 시녀에게 말을 대신 전해서 두 배로 긴장하게 했는데 한번은 다이쇼 덴노가 죽기 얼마 전 시절, 황태자 부부가 문병을 왔을 때였다. 나가코 황태자비는 그동안 어지간히 시달린 터라 시어머니 사다코 황후의 앞에서 너무 긴장하여, 장갑을 낀 채로 젖은 수건을 짜는 실수를 저질렀다. 이 때 사다코 황후는 "너는 무엇을 해도 서투르구나!!"라고 시종들도 있는 앞에서 나가코 황태자비를 꾸짖었다고 한다.[8] 나가코 황태자비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못하고, 시어머니의 꾸중을 듣고만 있었다고 한다.
사실 사다코 태후와 나가코 황후의 고부갈등에는 여러 이유들이 있었다. 나가코 황후는 방계 황족 가문의 적녀이지만 사다코 태후는 화족, 그것도 서녀이다 보니 며느리보다 정통성에 문제가 있었고, 이 탓에 심각한 열등감에 휩싸여 자신의 열등감을 나가코 황후를 괴롭히고 들볶으면서 해소시키려 했다는 설이 있다. 게다가 성격 차이도 있었고, 아들만 4명을 낳은 시어머니 사다코 태후와 달리 나가코 황후는 첫째부터 넷째까지 줄줄이 딸만 낳았는데, 이 역시 좋은 시집살이 구실이 되었을 것이다.
한편 고준 황후의 아버지 구니노미야 구니요시 왕은 일본 육군 대장으로, 1928년 대만 시찰 도중에 우리나라 독립운동가 조명하 의사의 의거로 상해를 입어 다음 해에 사망했다.[9]
6. 어록[편집]
國際信義上ドウカト思フガマア宜イ[10]
국제 신의상 어떨까 싶지만, 뭐 괜찮겠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진격을 묵인하는 쇼와의 반응, 1941년 6월 25일.
스기야마 메모 (杉山メモ) 상권 231쪽. 후지와라 아키라(藤原彰) 외, <천황의 쇼와사(天皇の昭和史)> 82쪽.[11]
戰争ハヤル迄ハ深重ニ始メタラ徹底シテヤラネバナラヌ[12]
전쟁은 시작할 때는 신중하게, 시작했으면 철저하게 해야 한다.
1942년 12월, 오구라 코지 시종의 일기에서 발췌
皇國カ其ノ總力ヲ擧ケテ勝ヲ決スルノ機方ニ今日ニ在リ卿等宜シク衆ニ先ンシテ憤激ヲ新ニシ團結ヲ鞏クシ奮テ敵國ノ非望ヲ破碎シ以テ皇運ヲ無窮ニ扶翼スヘシ[13]
황국이 총력을 기울여 승리를 결정지을 계기는 바로 오늘에 있다. 경들은 기꺼이 백성보다 앞장서서 분격(분노)을 새로이 하며, 단결을 굳건히 하고, 떨쳐 일어나 적국의 비망을 분쇄함으로써 황운을 무궁히 도울지어다.
Kill me. But not those who acted in my name.
저를 죽여도 되지만, 제 이름 아래에서 싸운 사람들은 구명해줬으면 합니다.
1945년 9월 27일, 쇼와 덴노가 맥아더와 첫 대면했을 당시의 발언으로 통역관 포비온 바워스의 증언 #
6.1. 한국 관련 발언[편집]
일본 고대사 연구가인 오다 노부오 씨가 2010년 JP NEWS와의 인터뷰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쇼와 덴노가 에가미 나미오와의 담화에서 자신들의 뿌리가 조선(한반도)에 있다는 것을 밝혔다고 한다. 에가미 나미오는 도쿄대 교수로서 1948년 기마민족정복왕조설을 발표하여 일본의 최고학술상인 천황상을 받고 그 이후로 나온 '한반도 도래인설'을 탄생시킨 역사학자다.
- 고대 일본의 지배층과 지금 천황(天皇)과의 관계는 어떤가.
"하나 예를 들겠다. 1989년 지금의 아키히토 천황 즉위식 때, 제단 위로 올라가서 30분 정도 자신이 천황이 되었다고 신에게 보고하는 시간이 있었다. 그런데 유독 그곳에만 카메라가 들어갈 수 없었다. 왜냐, 조선어로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아마도 '~은', '~는' 등의 말이 들어간 문구를 읊었을 것이다."
- 보다 구체적인 사례가 있다면?
"있다. 전후 기마민족이동설로 일본역사계에 화두를 던진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 선생이 쇼와 덴노(히로히토)을 만나러 간 적이 있다. 그때 그는 '죄송합니다. 폐하에 대해 반도에서 왔다는 등 이상한 이야기를 했습니다'라고 말하자 쇼와 덴노는 '아니야, 우리들도 조선 출신이야' 라고 이야기했다고 한다. 에가미 선생은 그것이 일생에 가장 충격이었다고 말했다고 한다."
- 그 이야기를 에가미 나미오 씨로부터 직접 들은 것인가?
"에가미 나미오 선생이 한국의 김용운 교수에게 직접 이야기했고, 김 교수로부터는 내가 직접 들었기 때문에 틀림 없다. 일본 황실이 한반도에서 왔다는 근거가 또 있다.
첫번째 '어머니'를 일본어로 오카-상(おかあさん)이라고 하는데, 황실에서는 '오모'라고 말한다. '오모'는 어머니가 아닌가. 2번째, 일본 황실에서 젓가락을 잘 쓰지 않고 숟가락을 쓴다. 마지막으로 일본인들의 기본적으로 앉는 자세인 정좌[正座]
를 하지 않는다. 즉 무릎을 꿇지 않고 양반다리를 한다는 점이다."출처: 일본 로열 패밀리는 백제 왕족! - 일본인을 통해 본 일본사회(3) -한일고대사 연구자 오다 노부오(宇田伸夫) 씨 (JP NEWS)
오다 노부오 씨가 언급하는 김용운 교수는 1927년 도쿄 태생이자 도쿄대 객원교수를 역임했던 수학자로, 2019년 자신의 유튜브 채널에서 위의 쇼와 덴노와 에가미 나미오 간의 담화에 대해 증언하기도 했다.
영상에서의 담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저는 천황님의 신성불가침이라고 하는 학설을 부정했습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대단히 미안하지만 저는 학자의 양심으로 제 업적과 연구결과를 발표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미안합니다." 하고 고개를 숙였습니다.
그것을 들은 쇼와 천황은 빙긋이 웃으며 한 말이 "나도 학자입니다"[15]
...중략... "나도 학자로서의 양심이 있습니다. 그것 뿐만 아니라 당신이 얘기하는 기마민족정복왕조설을 믿고 있습니다.""내가 당신의 학설을 믿는 이유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한 가지는 일본의 일반 국민들은 떡을 먹을 때 떡을 쳐서 먹죠. 그런데 궁에서만은, 왕실에서는 시루떡을 먹어요.[16]
그래서 우리는 시루토쿠를 먹습니다.' 라고 얘기를 했습니다. "그 다음에 일본 사람들은 밥을 먹은 뒤에는 차를 마시는데 궁에서는 숭늉을 먹습니다."[17] 그것도 한국의 풍습이죠. "그 다음에는 일본 사람들은 마늘을 안 먹습니다. 뭐 약용으로나 먹지 보통 식사로는, 식용으로는 안 먹는데 우리는 마늘도 먹습니다.[18] 나는 이 세 가지 만으로도 내가 기마민족정복왕조설을 믿습니다. 하나도 나한테 미안할 것 없습니다."
1984년 9월 6일 일본을 방문한 전두환 대통령과의 만찬사에서 쇼와 덴노는 다음과 같은 발언을 했다.
금세기의 한 시기에 양국 간에 불행한 과거가 있었던 것은 진심으로 유감이며, 다시 되풀이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는 귀국과의 교류를 통하여 많은 것을 배웠다. 예를 들면 기원 후 6, 7세기에 우리나라가 국가를 형성하게 되었을 때 귀국의 사람들이 많이 와서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학문, 문화, 기술 등을 가르쳤다는 중요한 사실이 있다 국가기록원
7. 기타[편집]
- 근대 이후 대영제국의 빅토리아 여왕(1819~1901),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황제인 프란츠 요제프 1세(1830~1916)와 함께 80세 이상을 살고 60년 이상을 즉위한 세 군주 가운데 한 명이다. 재위기간은 프란츠 요제프 1세 68년(86세), 빅토리아 여왕 64년(82세), 쇼와 63년(88세). 하지만 앞의 두 인물보다 쇼와 덴노가 더 주목받는건 앞의 두 인물은 1848년 혁명 이후로는 불안정하지만 그럭저럭 평화로운 치세를 보냈지만, 쇼와 덴노는 어린 시절에 조국의 근대화를 보고 자라고 본인의 재위 초기에는 조국이 미국을 상대로 큰 전쟁을 벌이다 패전하였으며, 이때 위기를 겪었지만 1950년 자신이 착취했던 옆나라에서 벌어진 내전으로 위기를 모면하고, 조국의 경제 고도 성장은 물론, 눈에 띄게 변화된 사회상까지 보고 죽었던 것이다. 일본의 각 연대 별로 산전수전을 다 겪었던 덴노라고 할 수 있다. 이보다 좀 더 앞선 시대에도 1명 더 있는데 청나라의 고종 건륭제(1711~1799)로, 무려 89세까지 60년을 재위했다. 게다가 이것도 본인은 감히 조부이자 성군인 성조 강희제보다 오래 재위할 수 없다는 논리로 자진 퇴위하여 나온 값이기 때문에 태상황제로서의 재위기간을 더하면 64년이다. 이 조건을 충족하는 현대 인물 가운데는 태국의 푸미폰 아둔야뎃 국왕이 있었다. 89세에 70년간 재위했다. 조만간 근대 이후 최장수 군주(빌헬름 1세, 만 91세)를 경신할지도 모를 뻔 했으나 2016년 10월 13일, 만 88세로 사망하면서 무산됐다. 영국의 엘리자베스 2세 국왕 역시 89세로 60년 기록을 넘겼으며, 2014년 부로 쇼와보다 장수한 군주가 되었다.
- 왜인지는 몰라도 극단적으로 사람과 접촉하는 것을 싫어하여, 의회가 열릴 때나 군대를 사열하는 꼭 참가해야만 하는 행사 이외에 사람들 앞에 모습을 드러내는 일을 꺼렸다고 한다. 게다가 의전 절차에 따라서 어느 누구라도 어떤 이유가 있더라도 자신의 신체에 손을 대지 못하게 했고, 이러한 습관은 그가 죽을 때까지 계속되었다. 이것이 할아버지 메이지 덴노처럼 쇼와 덴노 본인의 대인기피증 때문이었는지, 아니면 엄격한 (폐쇄적인) 황실 교육의 영향 탓이었는지는 원인불명이다.
- 워낙에 온실의 화초처럼 정말 귀하게 자란지라, 황태자 시절 영국을 방문했을 때 런던 지하철을 처음으로 타보게 되었다. 이때 차표를 역무원에게 건네주고 개찰구를 나가야 한다는 것을 몰라서 그냥 차표를 소지한 채로 개찰구를 지나가려다 그가 황태자인지 모르는 역무원이 그를 제지하면서 실랑이가 있었다고 한다.[19] 그리고 실랑이를 벌이던 차표는, 일본으로 가져와서 현재 궁정기념관에 보관 중이라고 한다. 또 한번은 아돌프 히틀러가 당시 최고의 차였던 메르세데스-벤츠 770K를 쇼와 덴노에게 선물했지만, 정작 쇼와 덴노는 승차감이 나빠서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 차는 현재 독일의 벤츠 박물관에 빌헬름 2세가 타던 동일 모델의 차량과 함께 전시되어있다.
- 선천적으로 건강이 좀 좋지 않아서 할아버지인 메이지 덴노와 마찬가지로 걸어다닐 때 발을 질질 끄는 습관이 있었다고 하며, 태어날 때부터 척추가 굽어 있었다고 한다. 또한 근시가 심해서 고생을 많이 했고, 안경을 써야만 앞이 보였을 정도로 안경은 필수품으로 가지고 다니면서 생활해야 했다. 그의 '대인기피증'은 여기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
- 뜨거운 것을 잘 먹지 못했다고 한다.
- 황실 내부 문제에 대해서는 당시에 진보적이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오랫동안 아들이 태어나지 않아 "후궁을 들이라"는 말을 들었지만 모두 거절했고,[20] 1933년 첫아들 아키히토가 태어난 뒤에야 여론이 없어진다.
- 1959년, 평민 출신의 쇼다 미치코가 아키히토 황태자와 결혼하여 일본 최초 평민 출신의 황태자비가 되었다. 쇼와 덴노가 찬성했기에 아키히토는 미치코와 혼인할 수 있었다. 당시 나가코 황후와 쇼와 덴노의 동생들 부부, 전 황족들과 궁내청이 그리 강경하게 반대했음에도 이들이 혼인한 것은 아키히토의 아버지 쇼와 덴노가 허락했기 때문이다. 당시 쇼와 덴노는 "황실에도 새로운 피가 필요하다." 며 아내 고준 황후처럼 그렇게 심하게 반대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결혼 이후 장장 40년동안 지독하게 시집살이를 시키고 죽을때까지 미치코를 극도로 싫어했던 아내와는 다르게 미치코와 사이가 좋았으며 아내와 며느리가 싸울때마다 가운데에서 중재자 역할을 많이했다.
- 일설에는 1945년 9월 27일, 더글러스 맥아더가 도쿄에 진주한 지 1달 동안 쇼와 덴노에 대해 어떠한 조치도 없자 쇼와 덴노가 직접 출두해 찍은 사진이 2장이며, 그중 쇼와 덴노가 90도로 허리를 꺾어 맥아더에게 굽신거리는 사진이 있으나 일본 측의 방해 공작으로 찾기 힘들어졌다는 루머가 있었다. 맥아더의 회고록이나 당시 함께 있었던 목격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쇼와 덴노가 맥아더의 환영 인사에 '감사하다'고 말하며 고개를 숙여 답했다는데,[21] 이 얘기가 전해지면서 와전된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쇼와 덴노가 90도로 허리를 숙여가며 굽신거리는 사진이 찍혔다는 증언은 없었으며, 애초에 흔히 사람들이 완전히 오해하는 것과는 달리 맥아더는 쇼와 덴노를 엄연히 한 나라의 군주로 대접했으며 그에 걸맞은 예의도 갖췄다고 한다. 위에 나와있는 두 사람이 함께 찍은 사진도 사실은 맥아더 특유의 허리 편 자세 때문에 조금 과하다 싶을 정도의 오해를 불러 일으켰지만, 맥아더의 회고록을 보나 당시 목격자들의 증언을 보나 맥아더는 분명히 쇼와 덴노에게 충분한 예의를 갖췄다.
- 2022년 우-러 전쟁중 우크라이나 측이 러시아를 비판하기 위해 히틀러(독)-무솔리니(이)-쇼와 천황(일)의 사진을 올렸는데, 일본 측의 거센 항의를 받고 사과를 했다. 이후 파시즘 지도자임에 논란의 여지가 없는 히틀러와 무솔리니만 남기고 삭제했다. 물론 가장 대표적인 도조 히데키가 있기는 하지만 위 문서에도 나와있듯 결코 그들과도 무관하지도 않다는 것이 중론이다.
8. 대중매체에서[편집]
일본 내에서는 아무래도 직접적인 언급 및 비판이 사실상 금기시되는 사회인식이 깔려있다 보니 일본 내에서는 사극에서만 짧게 나오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미국에서는 부정적인 묘사가 조금 우세이지만 그렇지 않은 작품들도 제법 되며[22] , 한국에서는 당연히 부정적인 캐릭터로 나오는 경우가 거의 대부분이다. 한국 대체역사물에선 죽거나 취급이 안 좋다.[그나마] 히틀러가 되었다에서는 2차대전 중 실종되어 아키히토에게 천황위가 넘겨지는 것으로 나왔고, 조선 독립 전쟁에서는 이봉창 열사의 의거에 폭사(그래도 천황제 자체는 유지되었다), 내 독일에 나치는 필요없다에서는 폭사되는 것은 물론이고 천황제가 아예 폐지되어 일본 국민 그 누구에게도 추모받거나 좋게 평가받지 못하는 존재가 되었다.
8.1. 만화 및 애니메이션[편집]
미국 애니메이션 사우스 파크의 친포코몬 에피소드에서 악역으로 등장하는데 친포코몬 완구회사의 사장으로 등장한다. 물론 본업인 천황도 겸하는 것으로 나왔다.
작중에서 미국 어린이들을 친포코몬으로 세뇌시켜 일본군 소년병으로 만들어 미국을 공격하려고 하나 학부모들의 작전에 의해 실패로 돌아갔다. 이 에피소드는 당연하게도 일본에서 방영되지 않았다.
마블 코믹스에서도 2차 세계대전중 발간된 에피소드에 등장하는데 추축국측 악역으로 짤막하게 등장한다.
8.2. 영화[편집]
- 1967년작 <일본의 가장 긴 하루>(日本のいちばん長い日)에서는 마츠모토 하쿠오가 연기했는데 얼굴은 나오지 않는다.
- <맥아더: 일본 침몰에 관한 불편한 해석>(원제는 엠퍼러Emperor, 2012년 작)에서는 카타오카 타카타로가 연기했다. 직접 나오는 것은 회담 장면 뿐이지만 전반적으로 종전 이후 일본을 휘어잡은 외국인 쇼군(맥아더 연합국 최고사령관)에게 핍박받는 형세로 나온다. 문제는 더글러스 맥아더가 전범 혐의 유무죄에는 관심이 없고 오로지 자신의 백악관 입성에 도움이 될만한 방향으로 수사판을 꾸렸다는 점. 결국 일본 본토 대공습으로 사망한 옛 일본인 여친을 잊지 못하는 주인공 보너 펠러스 준장[23] 에 의해 전범 혐의를 입증할 수 없다는 결론이 내려진 뒤 다 같이 평화와 일본의 재건을 도모하자는 결말이다.
- <일본 패망 하루전>에서는 모토키 마사히로가 연기했다. 위에 나온 <일본의 가장 긴 하루>를 2015년에 리메이크한 작품이다. 원제는 원작과 동일하고 "일본 패망 하루전"은 한국 개봉명이다.
8.3. 게임[편집]
- Paradox Interactive사의 2차세계대전을 다룬 게임인 Hearts of Iron 시리즈에서는 고증에 맞게 일본 제국의 국가원수로 나온다. 최신작인 Hearts of Iron IV에서는 시작시 전사의 규칙, 쇼와 덴노, 천황의 재가 라는 트레잇을 붙이고 나온다. 전사의 규칙은 AI에게만 적용되는 것으로 전쟁 중 동맹을 부르거나 동맹의 부름에 응답하려는 경향을 낮추게 된다. 독소전쟁에서 일본이 소련을 공격하지 않은 점을 구현한 것이다. 천황의 재가는 중국과 중국 공산당, 각 군벌 정부를 공격하는데에 제한을 걸어 놓은 것으로 유저들이 꼼수로 시작하자마자 중국에 전쟁을 걸어 중일전쟁을 더 빨리 시작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걸린 제한이다. 쇼와 덴노는 안정도를 무려 60% 높여주는 개사기 트레잇으로 공산주의나 민주주의로 일본의 이념을 교체할 시 국가 지도자가 다른 사람으로 교체되기 때문에 성능이 크게 떨어지게 된다. 그리고 1.5 패치와 함께 웨이킹 더 타이거 DLC가 나오면서 민주주의 루트는 입헌군주제를 도입하여 안정도 50%을 더해주는 국민정신으로 얻을수 있고, 공산주의 루트는 아예 죽이거나 만주국으로 추방시킨다.
- 위 게임의 대체역사 모드 The New Order: Last Days of Europe에서는 현실처럼 상징적인 권력을 가지지만, 숭배받는 존재로 등장하며 게임 중 만주국의 푸이가 사망할 시, 장례식에 참석하는 이벤트가 있다. 또한 핵전쟁으로 세상이 멸망하는 엔딩에서는 히로히토가 지은 절명시를 볼 수 있다.
천황의 절명시
화염이 천하를 뒤덮고
천지신명이 내 기대를 저버렸으니
제국이 우리를 끝내는구나
무슨 명목으로 성황들을 뵌 단 말인가...
- 위 게임의 대체역사 모드 Red Flood에서는 게임 시작 이전에 암살당하게 되어 등장하지 않고 동생 야스히토가 에이겐 덴노로 재위하게 된다.
- 위 게임의 대체역사 모드 THE LAST EMPIRE에서는 현실과 역사가 바뀐 탓[25] 에 원역사와 달리 개념적인 개혁군주로 바뀌었다. 오히려 현실의 쇼와 덴노와 비슷한 사람은 원역사의 일본 제국 포지션인 대한제국의 황제 이진이다.
- 콜 오브 듀티: 월드 앳 워에선 게임 시작 컷신에서 잠시 등장한다.
- 콜 오브 듀티 시리즈의 나치 좀비 모드에선 설정상으로만 언급. 나치 독일의 비밀 연구 조직인 그룹 935를 동맹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 지원해주었으나[26] , 자신의 군대가 좀비로 변하는 대참사가 터지자, 타케오 마사키를 파견한다. 그러나 모종의 이유로 그를 버리는 바람에, 타게오는 마루타 신세가 되어버렸다.
8.4. 드라마[편집]
-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인 더 크라운 시즌 3 8화에서 부인 나가코 황후와 함께 잠깐 나온다. 배우는 이가와 토고. 후두암으로 시한부 판정을 받은 에드워드 8세와 그 부인 월리스 심프슨의 초청을 받고는 그 둘이 살고있는 프랑스 파리 저택에 방문하나, 실상은 에드워드가 자신의 명예 회복을 위해 떼를 써서 부른 것이었고[27] , 히로히토 본인도 그걸 알기에 상당히 불편한 기색으로 에드워드와 마주한다. 이후 고향에서 쫒겨날 바에는 죽는 게 낫다며 에드워드를 돌려서 까고는 퇴장.[28]
- 추축국이 2차 대전에서 승리한 세계관을 다루는 높은 성의 사나이에선 일제가 식민지 유지 능력을 상실해가자, 본토를 지키기 위해선 점령지 일부를 포기해야 한다는 걸 받아들이고 북미 점령지에서 철수하겠다는 연설을 한다. 물론 음흉한 것은 어디 안 가서, 철수 직전까지 자신을 거슬리게 한 미국 저항군들을[29] 엿 먹이기 위해 국가 운영에 필요한 모든 행정 자료들을 소각하거나 본토로 가져오게 한다. 덕분에 저항군은 나라를 되찾은 건 좋은데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골머리를 앓게 된다.[30]
8.5. 관련 저서[편집]
- 궁내청 저, 『쇼와천황실록』, 도쿄서적, 2015.
- 한도 가즈토시 저, 박현미 역, 『쇼와사』, 루비박스, 2010.
- 에드워드 베르 저, 유경찬 역, 『히로히토 : 신화의 저편』, 을유문화사, 2002.
- 허버트 빅스 저, 오현숙 역, 『히로히토 평전- 근대 일본의 형성』, 삼인, 2010.